맨위로가기

호소카와 하루모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1514년에 태어나 1563년에 사망한 무장으로,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이자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였다. 그는 1531년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격파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간레이로서 아시카가 막부를 장악했으나,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대립으로 인해 몰락했다. 1549년 나가요시에게 배신당하여 오미국으로 추방되었고, 이후 교토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61년에는 아들 호소카와 하루유키를 당주로 세웠으나, 하루유키가 전사하고 자신은 유폐되었으며, 1563년 후몬지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관령 - 호소카와 요리유키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 시대에 관령으로서 막부를 통치하며 시코쿠 평정에 공헌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가네요키의 정변으로 실각 후 복귀했으나 메이토쿠의 난 이후 병사했다.
  • 관령 - 호소카와 마사모토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무로마치 막부 말기의 세키가와 가문 당주이자 관령으로, 명응의 정변을 통해 쇼군을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기행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호소카와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한 암살 사건으로 요절하여 가문이 쇠락하게 되었다.
  • 게이초 호소카와씨 - 호소카와 요리유키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 시대에 관령으로서 막부를 통치하며 시코쿠 평정에 공헌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가네요키의 정변으로 실각 후 복귀했으나 메이토쿠의 난 이후 병사했다.
  • 게이초 호소카와씨 - 오닌의 난
    오닌의 난은 1467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로 시작되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며,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 1563년 사망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 외교관으로 미셸 드 몽테뉴와 교류했으며, 폭군의 권력 유지가 피지배자들의 자발적 복종에 기인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표작 『자발적 예속론』을 통해 전제군주제와 폭정을 비판하고 시민 불복종과 비폭력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 1563년 사망 - 순회세자
    순회세자는 조선 명종과 인순왕후의 외아들로 6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요절하여 고양시 서오릉 경내 순창원에 묻혔으며, 시호는 순회이다.
호소카와 하루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호소카와 하루모토
본명호소카와 하루모토
다른 이름소메이마루
시대센고쿠 시대
출생에이쇼 11년 (1514년)
사망에이로쿠 6년 3월 1일 (1563년 3월 24일)
묘소오사카부다카쓰키시의 후몬지
통칭로쿠로
호소카와 하루모토 초상
호소카와 하루모토 초상 "호소카와 우쿄다이부 하루모토"
관직
관위종사위하・우쿄다이부
막부무로마치 막부간레이
수호야마시로국, 셋쓰국, 단바국, 사누키국, 도사국
가문
씨족호소카와 교초 가문
가족 관계
아버지호소카와 스미모토
어머니세이타이인
형제자매하루모토, 우지유키, 하타케야마 요시타카 정실, 아리마 시게노리 정실
배우자정실: 산조 기미요리 딸, 계실: 롯카쿠 사다요리
자녀아키즈모토, 하루유키?, 딸 (아사쿠라 요시카게 정실), 딸 (이이오 사다무네 부인), 딸 (겐에이 부인), 양녀: 뇨슌니, 오치 모 씨 (호소카와 모토쓰네의 아들)
생애 및 경력
활동 기간1520년–1561년
주군아시카가요시쓰나 → 요시하루요시테루

2. 어린 시절과 가문 계승

에이쇼 11년(1514년),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세타이인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六郎|로쿠로일본어였다. 그의 이름 '''하루모토'''(元春)는 훗날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편휘를 받은 것이다. 요시하루의 편휘를 받기 전이나 요시하루와 적대 관계에 있을 때는 로쿠로라는 통칭(가명)을 사용했다.

에이쇼 17년(1520년) 6월, 아버지 스미모토가 아와 국에서 사망하자, 하루모토는 7세의 어린 나이로 가문을 계승했다. 하지만 당시 호소카와 교초가의 가독을 둘러싼 호소카와 다카쿠니와의 싸움은 아버지가 여러 차례 패배한 채 끝났고, 하루모토가 계승했을 때도 여전히 열세인 어려운 상황이었다. 숙적 다카쿠니는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추방하고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며 사실상 천하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성년이었던 하루모토는 후견인 미요시 모토나가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키울 기회를 엿보았다.

다이에이 6년(1526년) 7월 13일, 다카쿠니가 사촌 호소카와 요시카타의 참언을 믿고 부하 고사이 모토모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모토모리의 형제인 하타노 모토키요, 야나기모토 겐지 등이 다카쿠니에게 등을 돌리면서 다카쿠니 세력은 내부 분열을 겪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시 13세였던 하루모토는 미요시 모토나가에 의해 옹립되어 같은 해 10월 다카쿠니 타도를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곧이어 기나이로 진출하여 다카쿠니를 배반한 하타노 군과 합류했다.

다카쿠니는 현직 간레이로서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받들고 있었기에 명분상 관군의 입장이었다. 이에 맞서 하루모토 측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요시하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옹립했다. 요시쓰나는 일찍이 다이에이 3년(1523년) 형 요시하루에게 밀려난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아와 국으로 내려왔을 때 함께 있었으며, 요시타네 사후 아와 슈고이자 하루모토의 사촌(혹은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2])인 호소카와 우지요키 밑에서 하루모토와 함께 양육되었다.

다이에이 7년(1527년) 2월 12일, 하루모토 군은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다카쿠니 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요시하루를 데리고 있던 다카쿠니는 오미 국으로 쫓겨났고, 하루모토는 이즈미 국 사카이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쇼군으로 내세운 일종의 망명 정권인 '사카이 쿠보 부'를 창설하여 다카쿠니 정권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3. 쇼군 대리 (''간레이'') 취임과 권력 장악

1531년(교로쿠 4년) 다이모쓰쿠즈레(大物崩れ)에서 숙적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자결로 몰아넣고 승리한 하루모토는 권력 장악에 나섰다.[2] 그는 아시카가 요시하루와의 화해를 통해 간레이 직위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이 과정에서 다카쿠니 타도의 공로자였던 미요시 모토나가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하루모토는 1532년(교로쿠 5년) 셋쓰 호족들과 손잡고 잇코잇키를 이용하여 음력 6월 20일 사카이에서 모토나가를 살해했다(이이모리야마 전투). 이후 통제 불능 상태가 된 잇코잇키와 홋케 잇키를 차례로 진압하고(야마시나 혼간지 전투, 교로쿠·덴분의 난, 덴분 홋케의 난), 1535년(덴분 4년)에는 잇코잇키와 최종적으로 화해했다.

잇코잇키와의 분쟁 중이던 1534년(덴분 3년), 하루모토는 키자와 나가마사의 중재로 살해한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와 화해하고 가신으로 삼았다.

1536년(덴분 5년),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동생 호소카와 하루쿠니가 이끌던 잔당 세력마저 토벌하면서 마침내 기나이(야마시로국, 야마토국, 가와치국, 이즈미국, 셋쓰국) 지역을 평정하고 아시카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간레이에 취임했으며, 1537년(덴분 6년)에는 우쿄다이후 관직에 임명되고 롯카쿠 사다요리의 양녀(산조 기미요리의 딸)와 혼인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3. 1. 아시카가 요시하루와의 관계

하루모토(晴元)라는 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에게서 편휘를 받은 것이다. 요시하루의 편휘를 받기 전이나 요시하루와 적대 관계에 있던 시기에는 '''로쿠로'''(六郎)라는 통칭을 사용했다.

초기에 하루모토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다카쿠니가 옹립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 맞서기 위해 요시하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아와 국에서 받들어 1527년 사카이 쿠보라는 이름의 유사 막부를 세웠다. 이는 다카쿠니 측이 요시하루를 내세워 관군을 칭하는 것에 대항하여, 하루모토 측이 역적으로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1531년 숙적 다카쿠니를 자결로 몰아넣고 승리한 후, 하루모토는 정권 장악 방침을 변경했다. 그는 사카이 쿠보였던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더 이상 내세우지 않고, 기존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화해하여 그의 밑에서 관령 직위를 얻으려 했다. 이는 호소카와 교초가의 가독과 간령 자리만 확보하면 쇼군이 누구인지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실리적인 판단이었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다카쿠니 타도의 최대 공로자였던 미요시 모토나가와의 심각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모토나가는 하루모토의 변심에 불만을 품고 요시쓰나를 계속 지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하루모토는 1532년, 키자와 나가마사 등 자신을 따르는 세력과 손잡고 잇코잇키를 이용하여 모토나가를 제거했으며, 아시카가 요시쓰나 역시 아와 국으로 추방했다.

내부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잇코잇키의 난을 수습한 뒤, 하루모토는 마침내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화해하고 그의 쇼군 지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시하루는 하루모토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고, 오미 국의 롯카쿠 사다요리 등 다른 실력자들의 막부 내 발언권이 커졌다. 또한, 오랜 내란으로 호소카와 교초가의 핵심 가신들이 다수 사망하면서 정치적 영향력과 노하우가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도 있다.

4.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대립과 몰락

미요시 나가요시


덴분 10년(1541년)에는 가신 키자와 나가마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요시 나가요시, 미요시 마사나가, 유사 나가노리 등의 활약으로 이듬해 진압했다(타이헤이지 전투).

하지만 반란은 계속되었다. 덴분 12년(1543년), 이미 사망한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양자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하루모토 타도를 내걸고 이즈미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같은 해 안에 진압되었지만, 덴분 14년(1545년)에는 야마시로국에서 다카쿠니파 잔당들이, 단바국에서는 나이토 구니사다 등이 다시 거병했다. 하루모토는 미요시 나가요시, 마사나가 등 여러 장수를 동원하여 이 반란도 진압했다.

덴분 15년(1546년) 8월, 우지쓰나가 하타케야마 마사쿠니와 유사 나가노리의 지원을 받아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우지쓰나는 나가요시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셋쓰국 대부분을 장악했다. 게다가 9월에는 우지쓰나파의 우에노 구니요시도 다시 거병하여 교토로 진격하자, 하루모토는 단바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같은 해 12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오미국 사카모토에서 적자 기쿠토마루원복 의식을 치르고 쇼군직을 물려주었다. 이때 롯카쿠 사다요리간레이 대리로 임명되어, 본래 간레이가 맡아야 할 가관역(에보시오야)을 수행했다. 이는 당시 하루모토가 전투 중이어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제로는 간레이 자리가 비어 있었고 하루모토가 간레이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레이인 호소카와 가문보다 격이 낮은 롯카쿠 가문 당주가 쇼군의 에보시오야를 맡은 것은 하루모토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었다[3]. 결국 쇼군 요시하루 부자마저 우지쓰나 지지로 돌아서며 하루모토와 적대하게 되었다.

이에 하루모토는 덴분 16년(1547년) 반격에 나서, 미요시 나가요시의 활약으로 7월 21일 샤리사 전투에서 우지쓰나와 유사 나가노리 군대에 승리했다. 또한 롯카쿠 사다요리의 도움으로 쇼군 요시하루와도 화해하여 우지쓰나의 반란을 일단 진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도 잠시였다. 덴분 17년(1548년) 5월 6일, 과거 우지쓰나에게 붙었던 셋쓰의 호족 이케다 노부마사를 할복시킨 사건은 미요시 나가요시를 비롯한 셋쓰 호족들의 반발을 샀다. 같은 해 8월, 나가요시는 일족 내 분란의 원인이었던 미요시 마사나가를 토벌하게 해달라고 하루모토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나가요시는 10월에 우지쓰나 편으로 돌아서서 군사를 일으켜, 마사나가가 농성하던 셋쓰 에나미성을 포위했다. 하루모토는 마사나가의 아들 마사카츠를 저버릴 경우 기나이 호족들의 지지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불리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나가요시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덴분 18년(1549년) 6월, 하루모토는 롯카쿠 군의 지원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려 했으나, 기선을 제압당해 에구치 전투에서 나가요시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미요시 마사나가를 비롯한 많은 부하를 잃은 하루모토는 추격을 피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함께 오미국 사카모토로 도망쳤다. 이 패배로 하루모토는 사실상 권력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5. 은퇴와 죽음

에이로쿠 4년(1561년), 은거 중이던 하루모토는 차남 호소카와 하루유키를 내세워 롯카쿠·하타케야마 군과 함께 오미에서 미요시 나가요시에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미요시 군에게 패배하고 아들 하루유키마저 전사하자, 결국 미요시 나가요시와 화해하였다. 이후 셋쓰의 후몬지 성에 사실상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보협인탑


에이로쿠 6년(1563년) 3월 1일, 하루모토는 유폐되었던 후몬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50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호소카와 씨족의 종가는 사실상 힘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루모토 사후 적남인 아키모토(노부요시)가 가독을 상속했지만, 이전과 같은 세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이후 아키모토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그의 자손들은 아키타 씨에게 의탁하여 미하루번의 가로(家老)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한편, 하루모토와 대립했던 호소카와 우지쓰나는 간레이에 임명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명확한 기록은 없으며 곧 사망했고, 이후 간레이 직위에는 아무도 임명되지 않아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6.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호소카와 스미모토(1489-1520)
어머니세타이인
정실산조 킨요리의 딸
계실롯카쿠 사다요리의 딸
아들 (계실 소생)호소카와 아키모토(1548–1615)
아들 (생모 불명)호소카와 하루유키?
딸 (생모 불명)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정실
딸 (생모 불명)이이오 사다무네의 처
딸 (생모 불명)쇼코지 겐에이의 처
딸 (생모 불명)다이도지 아키에이의 처
양녀뇨슈니(1544-1598) 켄뇨의 처, 산조 킨요리의 셋째 딸


7. 평가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기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그의 통치 기반은 견고하지 못했다. 결국 미요시 나가요시와 같은 유력 가신들의 배신으로 인해 권력 기반을 상실하고 정치적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다. 그의 몰락 과정은 하극상이 빈번했던 센고쿠 시대의 극심한 권력 투쟁과 정치적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서적 奈良県史 第十一巻 大和武士 名著出版
[2] 논문 細川澄元陣営の再編と上洛戦
[3] 논문 戦国期足利将軍家の任官と天皇―足利義晴の譲位と右大将任官を中心に―
[4] 문서 福島、p.105-1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